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한가
[2015-06-19 청년의사 이혜선 기자]
▲ 급성골수성백혈병 완치자인 이충호씨는 4년 전부터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운영하는 감염예방 특수차량 클린카(무균
차량)를 운전하고 있다.
영화 ‘러브 스토리’하면 유명한 영화 배경음악과 함께 흰 눈밭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주인공 올리버와 제니가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이 연인을 갈라놓은 것은 다름 아닌 백혈병(제니)이었다. ‘러브 스토리’처럼 한때 백혈병은 드라마나 영화의 비극을 불러오는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현재 더 이상 제니와 같은 주인공을 찾기 힘들다. 현재 백혈병은 불치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8년 노바티스가 선보인 표적치료제 글리벡(성분명 이매티닙)의 등장 이후 백혈병 환자들의 생존율은 급격히 늘어났다. 백혈병이 사실상 만성질환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병이 진행되는 급성골수성백혈병(Acute Myeloid Leukemia, AML)은 여전히 불치병이다. 진행 속도가 빠르고 딱히 치료방법도 마뜩치 않다. 성인 급성백혈병 중 65%를 차지하는 많은 AML 환자는 아직도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급성골수성백혈병
이충호 씨는 지난 2006년을 돌이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해 봄, 그는 임원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승진자를 위한 사전 교육도 받아야 했고, 실적을 위해 업무량도 늘렸다. 과다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늘 몸이 피곤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체중도 급격히 줄었다. 갑자기 살이 빠지다보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쇠약해졌느냐”는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승진을 앞두고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어쩐지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넉살 좋게 살을 빼는 중이라고 둘러댔지만 자꾸만 정기 건강검진을 미루게 되더라고요. 승진을 앞둔 시점에서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돼 병원에 갈 수 없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 그는 회사 근처에 있는 강남 성모병원을 찾았다. 간단한 검사만 하면 끝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의사는 그에게 “글로불린 수치가 역전됐다”고 말했다. 이충호 씨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재검사를 받은 그에게 의사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일 확률이 95%라는 말을 건네며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상황이었어요. 직장인이 연휴 하나 바라보고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휴만 보내고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딱 세 가지를 주의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코피가 나서 멈추지 않거나, 이유 없이 멍이 생기거나, 열이 38도 이상 지속되면 해열제를 먹지 말고 재빨리 응급실을 방문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셨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병에 대해 무지했던 것 같아요.”
추석연휴 마지막 날, 처갓집에 들른 그는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순식간에 열이 41도까지 급격히 올랐다. 간신히 찾아 간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까무룩 기절한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수술대 위에서 중심정맥삽관을 통해 항암제를 투여 받고 있었다. “그때서야 제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실감했어요. 백혈병이라고 하면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이 걸렸던 병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던 제가 무균실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조혈모세포를 이식할 날만 기다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게 그는 급성골수성백혈병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한 회사의 임원으로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항암치료도 고통스러웠다. 항암치료를 받다가 호흡이 멈춰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턱없이 모자란 무균실에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어 하는 환자와 보호자 간에 신경전도 치열했다. 항암치료가 실패할까봐 두려운 한편, 한 번에 10kg씩 빠지는 체중과 오심, 구토, 설사 등 항암제 부작용이 그를 괴롭혔다. 항암치료 후에는 혹시나 모를 감염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반려견도 다른 곳에 보내야했고, 폐렴 등 합병증이 생길까봐 늘 두려워해야 했다. 지금이야 희귀난치질환의 환자 본인부담률이 5%여서 비용 부담이 적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치료에 들어간 비용만 1억 원이 훌쩍 넘었다. 다행히 그는 항암치료에 효과를 보여 7개월 만에 조혈모세포를 이식하고 건강을 되찾았다. 7년 째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아직까지 재발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그는 현재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운영하는 클린카(무균차)을 운전하며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백혈병 환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클린카를 운영하며 만나는 환자들의 아픔과 두려움을 그는 누구보다도 이해한다.
“대부분 백혈병 환자들은 저와 같은 치료과정을 거치게 돼요. 그래서 어떤 점이 두려운지, 어떤 게 힘든지 정말 잘 알거든요. 저 자신이 그런 분들에게 완치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 독한 항암치료를 견디기 힘들어 해요. 젊은 친구들도 힘들어하는데 노인 분들은 더 견디기 힘들어 하시죠.”
이충호 씨와 같은 경우는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 중에서도 다행인 축에 속한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은 어느 연령층에서도 발병할 수 있지만, 고령일수록 유병률이 증가한다. 평균 발병 연령이 약 70세일 정도로 고령환자가 특히 많다. 특히 고령의 환자인 경우, 기저질환 때문에 치료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만성백혈병과 달리 병의 진행속도도 빠르다보니 생존율이 높지 않은 실정이다. 고려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최철원 교수가 최근 열린 혈액학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고령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는 동반질환이 다양하고 약제 대사가 현저히 저하되는 특징을 보였다. 때문에 고령환자의 경우 강한 항암치료보다는 저용량의 항암제를 사용해 유지요법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 1월 급성골수성백혈병로 판정받은 72세 전종원 씨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종원 씨는 약간의 고지혈증 증상이 있고 과거 방광암 수술을 한 것 외에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아들인 전영조 씨는 아버지가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렸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 받기 전에 아버지가 부쩍 기운도 없고 입맛도 없다고 하시군요. 뭘 못 드시니까 몸무게도 많이 빠지셨어요. 그냥 연세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 백혈병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병원에 가서 피 검사를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시더군요.”부랴부랴 서울대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아버지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는데, 다행히도 항암치료에 효과를 보이며 한 때 관해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말부터 아버지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지금은 순천향대 부천병원 무균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전영조 씨는
매일 병원에 들르는데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세요. 항암치료 할 때는 계속 누워계셔야 하고 밥도 잘 못 드세요. 무기력하게 누워만 계시는데 마음이 아프죠. 나이가 있으신 데다 보험적용이 안 되다보니 병원에서도 조혈모세포 이식은 아예 시도를 못하시더라고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또 해드릴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만성’은 잡았는데, ‘급성’은 왜 못 잡을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급성백혈병 환자는 지난 2010년 7,976명에서 2014년 10,612명으로 해마다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만성백혈병 환자도 2010년 3,656명에서 2014년 5,703명으로 늘고 있지만, 이 두 질환의 치료예후는 현저히 다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염색체 이상으로 발생되는 bcr-abl 단백에 의한 유전적 원인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글리벡 개발 이후 완치가 낯선 질환이 아니다. 그러나 급성골수성백혈병은 선택적으로 백혈병 세포만을 없애는 항암요법이 없다. 흡연, 유전적 소인, 방사선 조사, 화학약품, 항암제 등 치료약제에 대한 노출에 의해 발생될 수 있지만 발병 환자에서 이런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은 어느 연령층에서도 발병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고령일수록 유병률이 증가한다. 급성골수성백혈병 중앙 진단값은 대략 70세이다.
스웨덴에서 발표한 역학조사에 따르면, 급성골수성백혈병은 대개 80~84세에서 발생해 노령질환으로 정의된다. 고령환자의 경우, 건강상태, 기저질환, 염색체, 면역 등이 치료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치료예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06년 스웨덴에서 시행된 연구에 따르면 1,000명의 환자를 분석한 결과 나이가 들수록 불량한 예후인자를 보이는 염색체가 증가하고 70세 이상 환자의 절반에서 염색체 변화를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고령환자에서 완전관해가 이뤄지는 경우는 절반 정도에 불과해 고령환자의 2년 생존율은 15~20%에 불과하다. 대체로 65세 이상의 고령 환자의 2년 생존율은 30%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고령의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한 것일까. 현 시점에서 고령 환자의 치료방법에는 표준관해유도요법(3+7 regimen), 저메틸화(Hypomethylating agents), 저용량 Ara-C, 임상시험참여 등이 있다.
2013년 Leukemia에서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고령환자들의 치료방법으로 i-CT(intensive chemotherapy), ni-CT(non-intensive chemotherapy), 지지요법(BSC,best supportive care) 중 어느 방법에 적합한지 분류하려고 했다. 65세 이상 362명 환자를 대상으로 i-CT를 시행했으며 이 경우에 75세 이상의 심부전(EF≤50%), 폐질환 (DLCO≤65% or FEV1≤65%), 신장질환에 의한 투석, 급성 바이러스 간염, 감염 내성, 정신질환에 해당되는 환자군은 제외됐다. i-CT에 적합한 환자군에서 완전 관해율은 71%였고, low/int-ELN 위험도로 적용했을 때에도 완전 관해율은 76.6%, 생존율 중간값은 20개월로 나타났다. 환자의 상태에 맞는 치료전략은 쉽게 선택가능하고, 실제로 환자의 생존률과도 상관성이 높았다. 하지만 CGA(Comprehensive Geriatric Assessment)는 신체적, 인지적, 정신적 기능을 측정하고, 약물복용이나 통증, HCT-CI 점수를 고려하기에 고령 환자의 건강상태에 따른 분류에 효과적이다. 다변수 분석에 따르면 나이와 세포유전적 위험도, 환자의 기능상태를 보여주는 KPS와 자가인식하는 심장질환 기록, 백혈구
수가 11.2x103/μl 이상인 경우는 독립적인 예후 인자로 나타날 수 있다.
지난 2011년 ASCO에서 발표된 DACO-016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령의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와 새로 진단된 환자의 전체 생존기간(Overall Survival, OS)이 유의하게 개선됐다. DACO-016 3상 임상연구는 65세 이상의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 485명을 대상으로 15개국 65개 기관에서 시행된 연구다. 이 연구에서는 485명의 환자를 데시타빈(desitabine) 또는 선택치료(저용량 시타라빈, 지지요법)군으로 나눠 생존율과 부작용을 비교했다. 485명의 환자 중 242명은 데시타빈을 투여받았고, 선택치료군인 243명은 지지요법 또는 저용량 시타라빈으로 치료받았다. 연구 결과, 데시타빈 치료 시 생존율 중간값은 7.7개월이었으며 선택치료군은 5개월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OS 7.7 mo vs. 5.0 mo; HR=0.85; trend p=0.108).
하지만 1년의 추가 관찰연구에서 데시타빈 치료군의 생존율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향상된 사실이 확인됐다. 분석 시점에서 평균 생존기간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HR=0.82; nominal p=0.037). 또한 무작위로 배정된 치료 이후에 연속으로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생존율 중간값은 데시타빈이 8.5개월로 선택치료군의 5.3개월에 비해 유의한 차이를 보였다. 국내에서도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급성골수성백혈병 적응증을 획득했으며 급성골수성백혈병환자 치료 시 급여가 적용되고 있다.
서브 분석 결과를 보면, 75세 이상의 환자와 처음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된 환자, 미성숙세포(Blast) 30% 이상, 중등도 세포 유전적 위험도 환자(interrmediate risk) 등에서 치료선택군 대비 유의한 차이를 보였다. 또한 고위험군 환자일수록 완전관해 도달율이 높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완전관해율에 도달하는 것과 별개로 데시타빈은 선택치료군에 비해 수혈 의존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도 확인됐다. 또한 최근 고령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치료법은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특히 HMA와 HDAC 저해제, 레날리도마이드, 보르테조밉, 데시타빈 등 다양한 약제와 병용 시 치료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속속 진행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박실비아 교수는 고위험군인 MDS/AML 환자에서 HMA(저메틸화제)와 다른 약제의 병용요법에 대해 “고위험군 골수이형성증후군(Myelodysplastic syndrome, MDS)이나 AML 환자에게서 HMA 치료가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그 중 하나가 여러 가지 다른 약제와 병용하는 것인데 아직까지 최적의 치료가 정해지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적의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HMA는 상당한 효과를 보이는 약제는 맞지만 처음부터 반응하지 않는 환자가 있다는 게 문제다. 반응을 보인다 해도 계속 유지되지 않고 실패한하는데 한 가지 약제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데시타빈의 사용을 증가하거나 다른 약제와의 병용 등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의 AML 환자에서도 적절한 항암요법을 선택한 경우 성공적인 생존 연장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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